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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姓穴) 확인된 고령 봉평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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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姓穴) 확인된 고령 봉평리 고인돌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247)]

집모양 하니와(니이즈와센츠카281고분, 고훈시대), 가시와라고고학연구소박물관이미지 확대보기
집모양 하니와(니이즈와센츠카281고분, 고훈시대), 가시와라고고학연구소박물관
봉평리 고인돌은 대가야읍에서 성주 방면으로 난 국도 33호선을 따라 가다가 지방도 907호선으로 1.5㎞ 정도 지나면 봉평리에 있는 운수면사무소가 나오는데, 운수면사무소 뒤편 봉평초등학교 어귀 한다리마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도로 정비 사업으로 발굴한 후 덮개돌은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옮겨 놓았다. 이 지역에는 근래까지 1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1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지 정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1999년 농로(農路)를 개설하면서 대흥리 유적과 함께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1기의 덮개돌과 덮개돌 주변의 땅속에서 4기의 석관묘, 장방형의 유구(遺構) 및 구(溝), 석열(石列) 등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조사에서는 덮개돌과 석관(石棺)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아 덮개돌이 후대에 이동하였을 가능성도 지적되며, 지석(支石)의 유무도 확인되지 않았다. 매장 주체부가 판석조의 ‘ㅍ’자 형태의 석관으로서 바닥석이 깔린 상태였으며, 일단병식(一段炳式) 돌검과 촉신이 긴 돌살촉 등 출토 유물의 형태로 보아 유적의 편년은 청동기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봉평리 고인돌은 발굴 조사 전부터 이미 덮개돌이 둘로 갈라져 틈이 벌어져 있었는데, 훼손되지 않는 덮개돌의 북면에는 지름 10㎝ 정도의 성혈(姓穴‧바위구멍) 1개가 확인되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165㎝, 너비 148㎝, 높이 235㎝ 정도이다.


김경상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