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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은 하느님 말씀 신속히 실천하는 교회 조직…빈민 돕기 위해 자선냄비 모금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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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은 하느님 말씀 신속히 실천하는 교회 조직…빈민 돕기 위해 자선냄비 모금 시작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자선냄비와 구세군

다른 달은 몰라도 ‘12월’은 거리에서 금방 표가 납니다. 캐럴송이 들리고 교회 종탑의 네온사인이 반짝 거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2월을 수놓는 것은 단연 ‘구세군과 자선냄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2월의 상징, 구세군과 자선냄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구세군’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저 같은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군인봉사단체’로 알고 있었습니다. 군에 가면 ‘종군’이라 하여 교회 일을 보는 군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들이 겨울이면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위해 봉사 차 시내에 나온 줄 알았습니다.
사실 구세군이 ‘군인’이라는 이러한 오해는 비단 저뿐이 아니라 주변에도 많았고, 시간을 거슬러 100여 년 전에 서울 평동의 어느 광장에도 있었습니다.

1908년 10월 말, 영국인 ‘호가드’, ‘본윅’, ‘밀튼’ 등 <선발 구세군 개척단>은 자신들 앞에 운집한 군중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비록 사전에 <대한매일신보>에 모집광고를 내긴 하였지만, 이처럼 많은 지원병이 몰릴 줄은 몰랐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개척단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도열해 있는 지원병들의 굳게 다문 입과 결의에 찬 눈빛이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구세군’이라는 명칭 때문에 총칼을 들고 싸우는 군대조직으로 알았고, 입대 후 불릴 계급도 ‘병사’ ‘정교’ ‘참위’ ‘참령’ ‘정령’ ‘참장’ ‘대장’ 등 자신들이 몸담았던 부대의 계급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구세군을 군 조직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왜 많은 사람들이 군에 입대하려 했는지 당시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겠습니다. 1908년이면 바로 전 해에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군대가 해산되고 일부 병사는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고 있었지만, 대다수 병사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할 때였습니다. 그럴 즈음에 ‘치외법권’을 가진 영국인들이 군복차림에 입대를 권유하자, 기존 병사와 젊은이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은 것처럼 구세군 병영으로 몰려 들었던 것입니다.

자선냄비는 1891년 12월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한 바닷가 마을에서 종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자선냄비는 1891년 12월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한 바닷가 마을에서 종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더욱이 서울에 첫 선을 보인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전국적으로 ‘수천 명’이 모이게 된 데에는 한국인 통역들의 역할(?)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구세군에서 설교를 위해 구한 통역사들이 ‘동문서답’으로 통역을 하는 바람에 입대자 수는 늘어났지만, 이 일로 구세군 본부와 일본 경찰 간에 팽팽한 긴장이 조성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통역사례를 보면 이렇습니다. 선교사가 영어로 “하느님 앞에 속죄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면, 옆에 있던 통역사는 이 말을 받아 “우리나라의 국권을 속히 되찾아야 합니다.”라고 통역합니다. 이를 듣던 청중들은 “옳소, 옳소”하며 박수로 화답하지요. 그런데 청중들 틈에 끼어있던 일본 앞잡이가 이런 내용을 일본 헌병대에 이르게 되고, 일본은 구세군에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무슨 영문인지 모르던 구세군에서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는 부랴부랴 구세군신문에 이렇게 공표합니다. 『아모던지 우리 병사는 정치상 일에 간섭치 못하고 정부관리가 행정 하는 데 곤란을 니르키지 못하고, 구원 밧는 일을 하며 예수의 일과 죄나 마귀의 속박을 버서나 자유함을 항상 생각할 거시외다.』

시간이 흐르며 구세군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은 적이 실망하며 ‘애국적’ 연설을 하던 통역사들과 함께 구세군을 떠났습니다.

구세군은 교회입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General William Booth)에 의해 시작됩니다. 당시 영국사회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며, 수많은 가난한 노동자와 노숙자가 음지로 몰렸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사회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찼고, 자신들의 신앙과 삶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의 그림자라 할 수 있었겠지요. 이를 본 윌리엄 부스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찾아가는 교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런던 동부의 한 빈민촌에 천막교회를 세웁니다. 이때만 해도 교회이름은 ‘기독교 선교회(The Christian Mission)’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878년 기존 교회에서 행해지는 많은 형식을 걷어 내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속한 실천을 위해 군대조직을 차용하여 ‘구세군(救世軍, The Salvation Army)’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구세군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누가 뭐래도 빨간 ‘자선냄비’겠지요. 자선냄비는 1891년 12월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한 바닷가 마을에서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폭풍에 의한 난파로 갑작스런 재난을 당한 선원과 승객들, 그리고 1000여 명이 넘는 빈민촌 사람들은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구세군의 조셉 맥피 사관은 과연 어떻게 이들을 도울까 고민하고 있던 중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었지요. 부두로 나간 그는 부엌에서 쓰던 큰 쇠솥을 받침대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솥 위에 이렇게 써 붙였지요.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새벽까지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사관의 따뜻한 마음이 오늘날 전 세계 120개국에서 매년 12월이 되면 실시하게 되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처음 시작 되었을까요.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28년 12월 22일자 신문기사 내용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부내 구세군에서는 추운 동절에 한파에 쫓기는 가련한 빈자에게 쌀과 의복을 주어 연연히 구제 사업을 하여 오는 바 금년에도 구제 자금을 얻기 위하야 21, 22, 24, 25, 29, 31일 6일간 예정으로 구세군 일동이 총출동하야 부내 각 주요처에 자선냄비를 걸어놓고 널리 동정금을 모집하는 중인데 일반은 많은 동정을 하야 주기를 바란다.(중략)』

한국에서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1928년 12월 처음 등장한 후 6·25때를 제외하고 매년 12월에 등장하고 있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에서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1928년 12월 처음 등장한 후 6·25때를 제외하고 매년 12월에 등장하고 있다. 자료=글로벌이코노믹

이것이 우리나라에 자선냄비가 처음 등장할 때 상황입니다. 이 당시 구세군 사령관은 스웨덴 출신의 요세프 바(한국명 박준섭)였으며, 총 모금액은 ‘848환’이었습니다. 모금한 돈 전액으로 죽을 쑤어 노숙자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이후 6·25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한 해도 빠짐없이 자선냄비가 거리에 등장하여 불우한 이웃과 함께 세밑의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한편, 자선냄비도 시간이 흐르며 변천과정을 거칩니다. 참고로 실물사진은 인터넷 검색하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1928년 사용된 자선냄비의 모습을 보면 지금과 크게 다릅니다. 당시의 자선냄비는 위는 넓고 밑은 좁은 가마솥을 개조해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1964년 납작한 원기둥 모양의 자선냄비가 등장합니다. 모습뿐만 아니라 재질도 많이 변합니다. 가마솥 당시의 무쇠에서 양철로, 그리고 최근에는 부식되지 않는 아연도금강판으로 진화했습니다. 원래 자선냄비는 구세군에서 자체제작 하였지만, 2004년부터는 독일의 주방용품업체인 휘슬러코리아가 후원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합니다.

가난 할수록 겨울은 더 춥습니다. 12월이면 당신의 온정이 자선냄비에 채워지길 소망합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