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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제2의 배틀그라운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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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제2의 배틀그라운드는 없다

산업부 신진섭 기자.
산업부 신진섭 기자.
[글로벌이코노믹 신진섭 기자] 전무후무(前無後無). 배틀그라운드에 어울리는 수식어를 꼽자면 이것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간의 성과를 거론하는 것은 입이 아프니 그만두자. 잘 만들었고, 굉장히 잘 팔렸고, 앞으로도 잘 될 거라는 데 이견이 없다. 지난 10월 국감장에서 배틀그라운드의 상징인 ‘황금 프라이팬’까지 출현했으니 이쯤 되면 말 다했다 싶다.
누군가는 제 2의 배틀그라운드를 만들어 줄 것을 주문했고, 과도한 확률형 아이템 BM(비지니스 모델)을 버리고 ‘좋은 게임’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공허하고 또 공허한 이야기다. ‘언수외’ 위주로 교과서를 공부하면 된다는 충고와 별 차이가 없다.

배틀그라운드가 왜 탄생했고, 왜 성공했냐는 분석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알다가도 모른다’로 귀결된다. 주지하듯 배틀그라운드 제작사 블루홀은 배틀그라운드가 나오기 전까지 경영난에 허덕이는 보통의 한국 게임 개발사였을 뿐이다. 출시 전까지는 누구도 이 게임이 ‘좋은 게임’일지 ‘대박’일지 알 수 없었다. 만들었는데 좋았고, 생각보다 크게 성공했다. 모든 건 결과론적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제 2의 배틀그라운드는 없을 거라고. 돌연변이가 하나 출연했다고 해서 생태계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배틀그라운드와 한국 게임 생태계를 엮어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 게임계는 배틀그라운드 급이 아니다.

좋은 게임이란 창의적인 콘텐츠로 유저들의 니즈를 공략하는 게임이다. 블루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에서 종종 대작이 탄생한다. 방법론은 선명하지만 어느 누구도 ‘퍼스트 펭귄’이 되려 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 중소 게임 개발사들은 게임 타이틀 하나에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다. 창의적인 분위기, 오랜 개발 기간을 보장할 수가 없는 구조다. 이미 시장에서 입증된 BM을 이용해 ‘중박’ 전략으로 일단은 회사를 부지하는 것이 지상과제다. 실패할 수 있는 여유 따위는 없다. 창의적인 게임을 개발하겠다는 ‘꿈’은 ‘밥벌이’ 앞에서 쉽게 쇄락한다.

대형 게임사 입장에서는 굳이 제2의 배틀그라운드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 이미 검증된 방법으로, 수직 계열화된 ‘게임 공장’을 통해 상품을 제조하면 된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대규모 마케팅을 진행하고 자사 타 게임을 통해 홍보를 하면 유저 유입도 비교적 수월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 큰 기업일수록 기업 분위기는 경직되기 마련이다.
또 올해 소형 게임사들의 게임 공급을 담당하던 일부 중형 퍼블리셔(유통사)들이 제작사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소형 게임사들이 중박에 급급하니 게임 퀄리티는 떨어지고 퍼블리셔 입장에서도 손해가 누적된다. 그래서 중형 퍼블리셔들의 ‘꼬리 짜르기’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일각에서는 차라리 적당한 중국게임을 싼 값에 수입하는 게 남는 장사라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 3분기 약 3조원 규모인 국내 게임 시장에서 넥슨, 넷마블, 엔씨소프트 등 일명 ‘3N’사들의 매출 비중은 70%에 육박한다. ‘한국게임의 기록적인 성장’, ‘게임 한류’ 등은 3N의 독주로 해석해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문제는 시스템이다. 중소형 게임사들이 좋은 게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한 선제조건은 몇 번 실패를 해도 좋을 만한 그런 안정감이다. 신생 개발사 입장에서는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문체부가 공개한 2017년 게임 예산은 641억7300만원으로 한국 게임 산업 규모에 비하면 미약하다.

게임을 국가전략 사업으로 육성하는 중국, 대표적인 도시인 베이징시와 상하이시는 매년 게임 개발사에 900억 정도의 자금을 지원하거나 투자하고 있다. 주요 대학들의 연구진을 통해서 범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리 엔진이나 그래픽 소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폴란드 정부는 게임을 국가의 대표적인 문화산업으로 육성중이다. GameINN 프로그램을 통해 매년 수백억의 지원금을 개발사에 지원한다. 완성도 있는 게임이나 관련 기술 개발을 프로젝트로 제출하면 정부가 이를 검토한 뒤 지원금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위쳐’ 시리즈로 유명한 게임사 CD 프로젝트도 폴란드 정부로부터 다량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 게임 강국에는 다 이유가 있다.

좋은 결과를 원한다면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하나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실패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거기에 제2의 배틀그라운드의 가능성이 숨어있다. ‘규제’냐 ‘진흥’이냐를 놓고 탁상공론을 계속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미 한국의 게임 개발력이 중국에 뒤쳐졌다는 것이 중평이다. '산업 역군', '미래 먹거리' 등 한국게임에 달라붙은 수식어는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은 살을 엘 듯 춥고 각박하다. 키울 것인가 죽일 것인가. 결정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다.


신진섭 기자 jshi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