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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人 변화를 읽어 기후를 예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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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人 변화를 읽어 기후를 예측하다

[장현주의 동양학에 묻고 답하다(3)]계사년에 담긴 날씨의 비밀(하)

變은 자극해서 경계를 넘는 것


化는 어떤 경우도 생겨나는 것


변화는 요동, 사람을 휘젓는 것


미물들도 날씨의 징조를 알고

스스로 움직여 위기를 피하거늘…


하늘의 일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


그 징후를 단지 사람들이 모를 뿐


날씨는 확률이나 통계가 아니다


기후를 제대로 보려면


자신의 거죽만이 사물의 속말


그 眞正을 투시하는 버릇키워야


그것이 제마음을 잘 간수하고


몸이며 목소리를 지켜내는 일이다


[글로벌이코노믹=장현주 한글한자성훈색형(聲訓色形)연구소 소장] 우리가 날씨 이야기를 동양학에 대입해보는 것은 꼬질꼬질 쩐 종이에서 부스러기 담배를 덜어 긴 곰방대로 피워 물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때도 옳았고 지금에도 살아있는 현실적 사안들의 대안을 찾아보자는 얘기다. 그럼 날씨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장기적인 안목이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즉답이기도 하다.

그것은 개개인의 마음들이 모여서 일궈내는 사회의 일이며, 올해 농사를 무엇으로 지어야 모두에게 이로울 것인가와 같은 자잘하면서도 실질적인 경제이야기이기도 하다. 배금주의는 속물근성이라고 하겠지만, 가난한 사람의 남루한 옷차림으로는 말할 수 있는 것도, 해낼 수 있는 것도 기실 없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안팎의 강건이야말로 한 사회, 한 나라의 그 무엇을 함께 일굴 그 땅의 굳건함이 되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소행성B612의어린왕자'.
▲생텍쥐페리'소행성B612의어린왕자'.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예보에는 없던 소나기가 한 줄기 내렸다. 이것이 눈으로 모든 것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통계의 취약점이다. 퍼센트(%)로 따지는 강수확률도 마찬가지 아닌가. 비가 오면 맞는 것이고, 안 와도 그 퍼센트(%)안에는 들어가 있다. 그럼 안 온다던 비가 오면 그 코걸이 귀걸이도 못 한 것이 된다. 그런 날씨 얘기를 동양학으로 풀면서도 어렵고 복잡하게 말고 일기예보의 도표처럼 일목요연하게 이미지화를 바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은 지구 같은 땅 모양 동그라미가 아니라, 네모 안에 한 눈으로 들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비유를 들어보자. 생 떽 쥐뻬리의 <어린 왕자>의 첫 대목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얘기가 나온다. 그것은 뱀인가 모자인가. 올해 날씨를 스마트폰의 사이즈로 푼다는 건 동양학이라는 코끼리를 꿀꺽 삼키고 그것이 삭아지기를 기다리는 보아뱀의 모습과 같다. 말인즉슨 동양학 전부를 코끼리처럼 내어놓으라는 주문과 같다는 얘기다.

그래서 필자는 앞으로 이 지면에다 해야 할 말들을 글 그림이 있는 만화수준으로라도 그려야겠다는 필요가 절실해졌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그런 의미에서 웹툰은 얼마나 간결한가. 사족 같지만 필자는 요즘 강풀의 웹툰 순정만화 <마녀>를 빼놓지 않고 보게 된다. 그녀를 본 자 모두 돌이 되리라가 아니라, 죽는다. 너무 예뻐서?

예쁜 여자 얘기가 나온 김에 특히 올해 날씨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여자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아마 인형같이 예쁘다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바비 인형 같이 쭉쭉 빵빵한 사람. 이 인형(人形)이란 말 자체가 땅 위 날씨와 동격이 된다. 사람의 형용을 요약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근육질 남자를 인형으로 만드는 예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바비 인형류보다야 희귀한 축에 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인형은 특히 여자를 지칭한다. 그것도 요철(凹凸)이 심한. 사실 우리가 아기일 때는 그 누구라도 인형같이 예쁘다는 말 한두 번 쯤은 들으며 자라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 아기적 인형들이 자라서는 왜 천차만별이 되는가가 동양학의 아주 오래된 주제였다는 것이다.

그럼 올해 날씨가 과연 어떤 상황인지를 인형에 비유해보자. 그 밑바닥에 깔린 이유는 날씨가 비가 내리건 말건 알 수 없는 우리의 현실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날씨가 우리의 실재인가. 날씨는 하늘에서 땅으로 직접적으로 내린다. 그래서 하늘에서의 일이 땅에서의 일도 되던 것이 그 사이의 사람에게 닥치는 것이다. 여기 마리안느 페이스플(Mirianne Faithfull)이라는 바비 인형 같던 사람이 하나 있다. 유튜브 영상에서 그녀가 얼마나 어여쁜 인형 같았나. 그랬는데 이제와선 어떠한가를 가장 극적인 대비로 보여준다. 실제 겉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形)보다 더 극적인 변화는 사실 그녀의 목소리(聲)다. 그녀의 노래 (1965)무렵과 비교해보면,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OST인 (1993)에 와서는 상당히 중성적인 목소리로 변해 있다. 그 사이 그녀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가. 세세한 얘기의 골자는 가십꺼리로 들리고 보이는 것보다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변하게 하는 건 주어진 환경이고 빚어진 일들일 수 있지만, 정작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다.

▲호두까기인형으로변신한바비인형
▲호두까기인형으로변신한바비인형
사람 마음에서와 같이 기후는 흔히 변화로 읽힌다. 기후는 가만있지 않으며, 가만있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변화(變化)’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화는 어떤 씨톨에서건 꽃처럼 생겨나는 것이고, 변은 무엇이 지극해지면 그 경계를 넘어서버리는 것이다. 즉 산꼭대기나 지구의 극지방에 다다르면, 그 다음에는 반대쪽이건 오던 방향을 되짚어서건 그때까지의 진행 방향을 정반대로 꺾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변이다. 그래서 변화는 요동이 된다. 그것은 마치 쿠데타와 같아서 잘 되면 정권을 거머쥐고, 그렇지 못하면 작게는 자기 자신이라도 온통 휘젓게 된다.

마리안느 페이스풀로 돌아가서 그녀는 밖으로 거머쥐지 못했기 때문에 속을 스스로 해쳤다. 그 거머쥐는 것은 사랑이든, 일이든 순간순간 제 마음의 갈피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스로를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면 눈으로 보는 시야의 모든 것들을 밖으로 탓하게 된다. 알다시피 눈은 뇌를 향해 거꾸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기와 후의 그 ‘변화’가 어디로 꺾여 삼일천하 쿠데타가 될 것인지, 꽃이라도 생겨날 수 있을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 꽃(化)도 피긴 하되, 백합 같이 물기 많은 꽃이기라도 하면 지는 모습이 처참하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예전의 벌레(蟲)의 의미에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을 내포해서, 사람도 나충(倮蟲)이라고 불린 시절이 있다. 지금 계절 속을 움직이는 벌레는 무엇인가. 벌레를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 역시 날씨의 바람이다. 어떤 벌레가 요동하고 어떤 벌레가 죽은 듯이 감춰져 있는가. 이것은 하찮게는 굼벵이 같은 살덩이벌레(역시 나충)의 일이요, 하다못해 바퀴벌레 같은 덮개벌레(개충)의 일도 마찬가지다. 땅과 하늘을 포함해 이 모든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은 통계 같은 측정치로는 닿을 수 없는 예측의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정밀한 통계라도 그 역시 사후(事後)의 경험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찮은 동물조차도 날씨의 징조를 미리 알고 움직인다. 날씨를 제대로 보려면 지금부터라도 눈을 자기 자신의 거죽만이 아니라, 사물의 정말(眞正‧속말)을 투시하는 버릇을 들일 일이다. 그것이 제 마음을 잘 간수하는 일이고 몸이며 목소리도 지켜내는 바로 그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지켜내지 못하면 특히 올해는 마리안느 페이스풀을 양산하는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마음의 일 만이랴. 날씨의 첫 술로는 독자를 배불릴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아무리 모자같이 보여도 그것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인 줄 알았다. 올해 날씨이야기를 이렇게 마쳐도, 앞으로 할 이야기도 결국 날씨에 관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날 치의 토씨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