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문인 단계 지나 신화적 인물로 전설화

공유
0

문인 단계 지나 신화적 인물로 전설화

세계문학기행(11)-신화적 인물 셰익스피어(하)


출신성분, 학력, 결혼, 직업 등 모든 게 미스터리


신본주의 버리고 현세윤리‧시대정신 충실한 작품 집필




▲ 셰익스피어의 아내 해서웨이의 집
[글로벌이코노믹=김용만 소설가] 500년이 넘었다는 목제 고옥(古屋)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인근에 있는 성삼위일체교회(Holy Trinity Church)로 갔다. 14세기 캔터베리 대주교이며 대법관인 존에 의해 세워진 그 교회 북쪽 벽 가까이에는 대리석으로 치장된 셰익스피어의 묘가 있고, 매끈한 묘석 위에는 그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시가 새겨져 있다.



내 벗이여, 신의 뜻을 거역해서

여기에 묻힌 시체를 훼손하지 마오

이 묘에 손대지 않는 사람에겐 축복이 있고

이 시체를 옮기는 사람에겐 저주가 내리리라.



교회를 나와 마을길을 걷다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에이본 강가의 포구와 왕립극단 소유의 셰익스피어 극장을 둘러보았다. 애초에 셰익스피어 극단은 의전 장관인 챔버린의 후원을 받았으나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왕위를 물려받자 챔버린 극단에서 국왕극단(단원11명)으로 승격되어 영광을 누리게 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1마일 가량 떨어진 쇼터리(Shottery) 마을로 향했다. 부인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의 생가가 있는 그곳에도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셰익스피어보다 여덟 살이 많은 연상의 여인 집이라 그런지 더 고풍스러워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생가가 벽돌집인데 비해 갈대로 지붕을 덮은 초가집이지만 마당에는 꽃밭이 오밀조밀 꾸며져 있고 내부도 깔끔하게 회칠이 되어 있어 셰익스피어의 생가보다 더 양반스러우면서도 여성스러워 보인다. 농기구가 보관된 창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너른 정원이 농지였던 모양이다. 본채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 발치에 고풍스런 나무의자가 놓여 있어 지친 다리를 쉬기에 안성맞춤이다.

▲ 셰익스피어 시대의 거리모형나는 그 의자에 앉아 420여 년 전 열여덟 살의 앳된 셰익스피어가 큰누나 같은 해서웨이를 찾아와 어떤 몸짓으로 접근했을지를 상상하며 지그시 미소를 지어본다. 셰익스피어와 해서웨이의 결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1582년 11월 27일에 결혼허가서가 발행되고 다음날 결혼증서가 발행되었는데, 이미 임신한 지 4개월이 된 걸 보면 남녀가 일을 먼저 저지른 탓에 서둘러 식을 올린 게 아닌가 싶다. 물불을 못 가리는 셰익스피어가 먼저 대들었는지 노처녀 해서웨이가 먼저 미소년을 유혹했는지 그게 궁금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결혼허가서에는 신부의 이름이 훼이틀리로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날 발행된 결혼증서에는 해서웨이로 등재되어 있어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돈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해명은 셰익스피어가 훼이틀리를 사랑하여 결혼할 단계에 이르자 이미 임신한 해서웨이가 훼이틀리를 눈물로 설득하여 양보를 얻었다는 설과 담당 직원이 실수로 결혼허가서를 잘못 기입했다는 설이 있다. 여기에서 만약 전자가 사실이라면 셰익스피어는 한 여성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연상의 여인과 놀아난 셈이 되어 셰익스피어의 도덕성마저 엿볼 수 있게 된다. 어쨌든 결혼 6개월만에 첫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로 보아 셰익스피어를 정열이 넘치는 사춘기의 젊은이로, 나이 많은 해서웨이를 정숙하지 못한 처녀로 낙인을 찍는 사람이 많은데,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 부실은 끊임없이 화제를 유발시킬 소지가 있어 흥미롭다. 윌리암 셰익스피어는 아버지 존(John)과 어머니 메어리(Mary Arden) 사이에서 8남매 중 세 번째 출생한 맏아들이다. 아버지 존은 고향을 떠나 스트랫포드에 정착하여 맥주 감식가로 임명된 그해 양반 집안의 딸 메어리와 결혼한다. 그 후 장갑, 혁대, 지갑, 앞치마 같은 피혁제품을 생산하고 소맥 판매 독점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아 그 재력으로 읍 의원, 징수 책임관, 부읍장을 거쳐 읍장에까지 오른다. 하지만 그 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관직에서도 물러나고 교회 예배에 불참하여 국교기피자로 보고되기도 한다. 그가 몰락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가톨릭에 경도된 존이 개신교를 옹호한 국왕의 관청으로부터 미움을 샀다는 설과 오랫동안 관직에 머문 탓에 사업체가 기울었다는 설이 있다.

가계가 기울자 어린 셰익스피어(13세쯤)는 푸줏간 하는 아버지와 함께 도살장에서 일했다는 게 유력한 설인데, 송아지를 멋진 솜씨로 도살하면서 무슨 대사를 흥얼거렸다고 하니 선천적으로 광대기질을 타고 난 게 아닌가 싶다.

셰익스피어의 교육은 소년시절에 문법학교에 다닌 게 고작이고 그나마 졸업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당시의 왕립문법학교는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무상교육을 실시했으며 교사들 거의가 옥스퍼드 등 대학 출신이어서 어느 학교에도 뒤지지 않았다. 교재로는 카토(Cato)의 격언집과 릴리(Lily)가 저술한 <라틴어 문법>으로, 이 문법은 미국의 개척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인기 있는 저학년 교재로 사용되었다.

고학년 교재로는 로마의 철학자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고대 로마의 희곡작가 테렌티우스, 로마의 서정시인 오비디우스, 로마의 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 고대 로마의 희곡작가 플라우투스 등 로마 고전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었다. 그 외에도 희랍어를 익혀서 역사서와 고대 문학을 읽었을 것이다.

▲ 스트랫포드 교회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 무덤1585년 2월부터 1592년 9월까지 약 8년간을 셰익스피어의 행방불명기간(the lost years)이라 한다. 존 오브리(1626~1697)는 1681년에 쓴 <짤막한 전기들>에서 셰익스피어는 푸줏간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도왔고, 시골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밝혔는데 교사 생활은 교육배경이 열악한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지식수준이 높은 작품을 썼는지에 대한 의심을 지우는 단서를 제공한다.

셰익스피어가 고향에서 런던으로 떠난 시기는 158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상경 동기로는 고향의 동갑내기인 리처드 필드의 인쇄업 성공이 자극제가 되어 런던에 갔다는 설과 토마스 루시 경의 공원에서 불량배들과 사슴을 잡아먹다 처벌을 받고 그 분풀이로 조롱하는 발라드를 썼다가 중벌이 두려워 런던으로 도망쳤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상경 직전 스트랫포드를 방문한 5개의 극단 중에서 어느 한 배우와 친교를 맺고 떠났다는 설이 있다.

런던에서 극단에 고용되어 셰익스피어가 처음 맡은 직책은 극장 입장객들이 타고 온 말을 돌보는 일이었다.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전기를 쓴 로우는 그 직업을 ‘매우 비천한 자리’라고 적었다. 그후 배우와 번안자로 활동하다가 극작가로 부상했으며, 말로에게서 무운시(無韻詩)를 모방하여 극 쓰기를 시도했다. 1592년에 사망한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셰익스피어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 비난할 정도로 그는 이미 높은 명성을 얻고 있어 행방불명기간에 극작수업을 받지 않았나 싶다.

1597년, 셰익스피어는 고향 스트랫포드에서 가장 손꼽히는 저택이며 런던 시장이 은퇴생활을 즐기던 ‘뉴 플레이스’를 거금 60파운드에 구입한다. 그가 이미 명성과 함께 재력도 축적한 상태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날이 갈수록 언어구사력과 성격창조가 무르익어간 그는 영국 최고의 극작가로 부상했으며 특히 대학생들로부터는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스펜서와 영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서를 능가하는 존경을 받았다.

1613년 챔버린 극단의 전속 무대였던 글로브 극장이 역사극 <헨리 8세> 공연 중에 불타자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1616년 3월 25일 유서를 작성하고 한 달 후쯤인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사망 원인은 영국 최초로 계관시인이 된 벤 존슨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병을 얻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의 유서에는 맏딸 수잔나를 상속인으로 정하고 아내 앤 해서웨이에게는 3분지 1의 재산과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유산으로 남겼다고 적혀있다. 여기에서 3분지 1은 당시의 관례이며, 좋은 침대는 손님용이고 다음으로 좋은 침대가 부부용이어서 애틋한 사랑의 증표로 남겨준 게 아닌가 싶다. 셰익스피어 사망 후 해서웨이는 뉴 플레이스에서 7년 동안 장녀 수잔나 부부의 효도를 받으며 지내다가 1623년에 사망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여왕 시대에는 튜더 왕조의 정당성과 충성심을 고취하는 사극과 낭만주의적인 톤에 경도된 희극이 주종을 이룬 반면, 절대 왕권을 다지려한 후자의 시기에는 운명의 비극성에 경도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셰익스피어가 돈독한 기독교 신자임은 의심할 바 아니다. 그런 그가 구원과 같은 본격적인 종교극을 쓰지 않은 이유는 신본주의 윤리보다 현세윤리에 밀착시킨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영향인 동시에,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자신의 성격 탓이랄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문예부흥의 과도기에서 옛 것보다 새 것을 취하려는 시민의 욕구에 동조하면서도 그들의 과격하고 저속한 취향을 인본주의에 부합되도록 정화시켰다. 문예부흥기의 영국인들은 이성을 멀리하고 감성에 젖어 격렬하고 잔인한 유희를 선호했는데 곰이 개를 밟아죽이는 경기나 심지어 단두대에서 사형수가 피를 뿜으며 처형되는 광경을 즐겼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복수극의 인기가 높았던 것만 봐도 그 시대 영국인들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다.

노드릅 프라이는 셰익스피어가 신학적 범주에 속하는 연극을 쓴 적이 없고 속세적인 인간 생활에 관심을 보였으며, 따라서 속세 질서에서는 기독교적 사상과 비기독교적 사상이 중복되거나 일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셰익스피어이기에 기독교 사상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저항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기독교 사상, 즉 대 우주적인 지혜를 작품에 드러낼 수 있었다. 그의 불후의 고유성과 위대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제 셰익스피어는 문인의 단계를 지나 신화적 인물로 전설화되어가고 있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자연인보다 더 생동감 넘치는 인물로 창조되었기에 그 성격은 불멸한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전 인류의 원형이 되면서도 개인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요컨대 셰익스피어의 창조력은 유형과 개성을 융합시킬 수 있는 능력, 즉 개성을 유형화시키는 동시에 유형을 개성화 할 수 있는 능력에 있으며, 그의 극의 본질적인 매력은 비유적인 암시로 상상을 환기시키는 데에 있다 하겠다.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