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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세계대전 참전, 스페인 내전 개입 등 모험 가득한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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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세계대전 참전, 스페인 내전 개입 등 모험 가득한 일생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6)-헤밍웨이(상)


헤밍웨이의 폭력적인 삶과 죽음은 용기의 은유


문학과 인간의 사고방식 변형에 공헌한 대문호


허무에 뿌리를 둔 자신을 버리는 고독한 용기



[글로벌이코노믹=김용만 소설가] 1961년 7월 2일 아침, 아이다호 케첨의 자택에서 엽총 자살한 헤밍웨이의 종연에 대하여 당시 대통령인 케네디는 다음과 같은 애도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세계적인 위대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국민의 정서와 태도에 미국민 누구도 따르기 힘든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거성처럼 문학계에 출현한 이후, 그는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의 주창자로서 이 세대를 불후의 세대로 끌어올렸으며,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문학은 물론 인간의 사고방식을 변형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한 작가다. 오늘날 미국은 예술의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비록 그는 전 세계를 무대 삼아 위대한 세계시민으로 살아왔지만, 그가 명성을 떨치며 자신의 예술을 창조해낸 바로 그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을 시작하였듯이 그 종지부도 미국에서 찍고 말았다.”

대통령 출마 전에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책을 낸 케네디는 용감하고 떳떳한 정치가이기에 헤밍웨이 같은 작가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1962년, 세계3차대전(핵전쟁)으로까지 비화될 뻔한 ‘쿠바 위기’ 때 소련(수상 후르시초프)과 맞서 해상 분쇄를 단행한 케네디의 용기는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헤밍웨이가 사망한 이듬해, 그의 동생 레스터는 전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의 형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폭력적인 죽음의 방법을 선택했으나 그의 삶의 방법도 폭력적이었다.”

▲ 헤밍웨이 박물관여기에서 폭력이란 말은 용기의 은유랄 수 있다. 자살을 용기라고 표현할 수 없어 그처럼 폭력이란 단어를 차용했을 뿐인데, 사실 헤밍웨이의 용기는 사전적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단어다. 그의 용기는 허무에 뿌리를 둔 용기여서 성취를 전제한 용기가 아니고 자신을 버리는 용기이며 그래서 고독한 용기이기도 하다. 1차세계대전 참전, 스페인 내전 개입, 2차세계대전 종군 등 그의 모험적인 생은 삶의 애착보다도 자기 삶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주어진 생을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지 않고 방목시켰다라고나 할까. 그런 투기(投棄)가 진정한 용기가 아닐는지. 때문에 헤밍웨이는 진실된 인간형일 수밖에 없고, 자살이 그 진실의 원형이랄 수 있겠다.
5일 동안 캐나다 록키산맥 횡단을 마치고 시카고로 들어오면서 나는 헤밍웨이의 용기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 보았다. 8년 전 아프리카 케냐를 여행할 때도 나는 암보셀리의 평원에서서 킬리만자로를 바라보며 그의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항상 죽음의식을 안고 극단적인 정(淨)의 세계와 극단적인 동(動)의 세계를 체험해온 나로서는 그의 용기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가로수가 우거진 시카고 교외의 생가 주변은 그의 격정적인 삶과는 대조적으로 가을볕이 한가롭게 깔려 있다. 기념관으로 꾸며진 생가는 내부가 깔끔하면서도 포근한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서가 위에 걸려 있는 부모의 사진 중에서 아버지 사진에 먼저 눈이 간다. 열 살짜리 어린 자식에게 엽총을 사준 아버지가 아닌가. 한국의 아버지로서는 상식의 영역을 넘는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가뭄에 메마른 저수지에서 붕어를 잡아왔다가 익사사고를 걱정한 아버지한테 작대기 찜을 당한 적이 있다. 총기사고의 걱정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에게 엽총을 사준 헤밍웨이 아버지의 그 유별난 자식사랑이 나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시카고 생가를 찾고 보니 헤밍웨이가 낚시, 사냥, 권투 같은 거친 스포츠에 몰두하며 야성적인 삶을 즐긴 키 웨스트가 떠오른다.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 반도 끝에 있는 산호섬의 키 웨스트에는 헤밍웨이가 1931년에 구입하여 10년 넘게 살아온 스페인 풍의 아름다운 집이 있는데 『무기여 잘 있거라』 등 그의 대표작들이 그 집에서 완성되었다. 또한 키 웨스트는 낚싯배 파일러를 타고 멕시코만을 휘저었던 헤밍웨이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며, 그의 단골 바인 ‘캡틴 토니스’와 생음악 주점인 ‘슬로피 조스’가 있어 지금도 헤밍웨이를 기리는 문학애호가들의 발길이 번다한 곳이기도 하다.

▲ 헤밍웨이의 서재에 선 필자헤밍웨이의 궤적을 살피자면 쿠바를 빼놓을 수 없다. 머잖아 그곳도 답사할 계획이지만 아바나에는 헤밍웨이의 유품 일부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어 요즘은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카스트로 정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 궁금하다.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남긴 업적은 작품 말고도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와 ‘하드보일드 문체(Hard-Boiled Style)’가 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낀 세대, 20년대 미국에 팽배해 있던 물질만능주의(특히 자동차 산업)에 식상한 세대로, 그들은 전쟁 후에도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서 방황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불러진 이름이다. 독가스까지 살포하는 비열한 전쟁을 목격하고 인간회의에 빠진 그들은 기성의 관념체계, 허구화된 제도, 내용 없는 윤리감각 등 일상적인 질서로부터 일탈하려는 욕구가 분출했던 것이다.

하드보일드 문체는 헤밍웨이의 독특한 문체로,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올리는 기법으로서 주로 비정, 냉혹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헤밍웨이는 고교 졸업 직후에 7개월 동안 근무했던 <캔사스시티 스타>지에서 엄격한 문체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런 문체 수업이 후일 헤밍웨이로 하여금 그의 간결문체를 유명한 문체로 부각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은 입사 당시의 기자수첩에 적힌 아주 흥미로운 주의사항인데, 이런 메모로 보아 하드보일드 문체는 원래 신문기사 문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짧은 문장을 사용하라. 패러그래프(첫문장)을 짧게 하라. 강력한 미어(美語)를 구사하라. 긍정형의 문장을 사용하라. 부정형은 금물이다. 낡은 속어는 사용하지 말고. 속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신선한 어휘를 선택하라. 되도록 형용사를 쓰지 말고, 특히 ‘웅장한’ ‘화려한’ ‘원대한’ 따위의 극단적인 형용사를 피하라.”

헤밍웨이는 1899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 교외인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먼즈는 오크파크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낚시, 수렵 등 스포츠를 즐긴 멋쟁이었고 어머니 그레이스 호울은 신앙심이 깊고 음악을 애호한 사교적인 여성이었다. 아버지는 헤밍웨이가 세 살 때에 이미 낚시 도구를, 열 살 때에는 엽총을 사주어 원시림지대를 마음껏 누비게 했으며, 어머니는 그에게 첼로를 사주어 매일 1시간씩 연습을 시켰다. 첼로 대신 엽총을 택했지만 그처럼 부모의 상반된 정서는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야성적인 스포츠를 즐기면서도 댄스파티에 끼지 않을 만큼 고독을 즐기기도 한, 양극화된 성격구조를 형성시킨다. 열네 살 때 권투선수까지 경험해본 그는 고교생이 되자 문학에 흥미를 갖고 학교 주간지의 편집도 맡아보고 집필에도 열중하지만 두 번이나 가출할 만큼 청소년 나름의 심리적 갈등에 시달리기도 한다.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한 해인 1917년 봄에는 고교 졸업을 앞둔 시기인데도 자원입대를 열망한다. 전사를 걱정한 아버지의 반대로 입대가 좌절되자, 그는 반항하는 뜻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졸업과 동시에 큰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캔사스시티 스타>지의 기자가 된다.

19세가 되는 1918년 4월에야 헤밍웨이는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적십자사 앰뷸런스 운전사가 되어 소망해온 군생활을 시작한다. 북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무공훈장까지 받는데, 밀라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 미국인 간호사 그로스키와 열애에 빠진다. 품행이 우아하면서도 밝은 성품인 그녀는 헤밍웨이를 사랑은 하되 연하의 남자인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진 못한다. 술로 마음을 달래야 했던 헤밍웨이는 그 사랑을 나중에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격정적으로 그린다.

제대 후 귀국하여 작가 셔우드 앤더슨을 만나면서 문학인생을 작심한 헤밍웨이는 1921년 첫 부인인 해들리 리차드슨과 연애결혼하고, 캐나다의 <토론토 스타 위클리>지의 해외특파원이 되어 파리로 떠난다. 앤더슨의 소개로 파리에서 미국의 여류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을 알게 된 헤밍웨이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 『율리시즈』의 저자 제임즈 조이스 등과도 친분을 맺었으며, 그들로부터 반복과 이미지즘과 의식의 흐름 등을 습득하고 그것을 소설에 적용한다. 그중 파리그룹의 중심인물인 거투르드 스타인과 에즈라 파운드는 헤밍웨이의 문학에 직접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특히 스타인 여사는 훼밍웨이의 문학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녀는 프래그머티즘을 신봉한 윌리엄 제임스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모더니즘 작가로, ‘길 잃은 세대’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헤밍웨이는 그녀를 비롯하여 앤더슨, 파운드 등 선배 문인들의 영향과 충고를 받아들여 하드보일드 문체를 발전시킨다. 헤밍웨이가 단편과 시를 처음 발표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26에 출간되어 헤밍웨이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장편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는 1차세계대전 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에는 길 잃은 세대와 하드보일드 문체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다. 파리 특파원 생활, 영국 미국 작가들과의 교류, 보헤미안들과의 교제 등 그의 체험적 요소가 다분히 녹아 있는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는 환멸과 절망으로 얼룩진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인 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헤밍웨이는 이 장편에서 작중인물의 입을 통해 모든 사랑은 결국 섹스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했고, 세상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관심사라고 역설했다.

/글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