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기회주의 판치는 우리 현실에 창 들이댄 개혁 영웅

공유
0

기회주의 판치는 우리 현실에 창 들이댄 개혁 영웅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5)-세르반테스와 키호티즘(하)

고삐 풀린 魔性의 시대에 신비주의적 인물 돈 키호테 등장


세르반테스, 해전에서 부상입어 ‘레판토의 외팔이’란 별명 얻어


37세 때 세비아 감옥에서 필생의 역작 『돈 키호테』 구상


공상으로 미친 한 인간의 불장난에 659명의 등장인물 등장



[글로벌이코노믹=김용만 소설가] 스페인의 대표적인 고도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톨레도에 가까워지자 햇살에 반짝이는 주황색 도시가 시야를 압도한다. 중세의 이미지가 그대로 보존된 톨레도는 도시 외곽을 에두른 타호강이 해자(垓字) 역할을 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지만, 숱한 전쟁과 왕조의 부침이 그 고대도시의 얼룩진 역사를 말해준다.

산토 토메 성당에는 여전히 인파가 밀렸다. 몸이 밀리는 대로 흘러 성당 안에 들어서니 그 유명한 엘 그레코의 종교화 「오르가스(Orgaz) 백작의 매장」이 시선을 압도한다. 위는 천상의 세계, 아래는 지상의 세계, 중앙은 오르가스의 영혼인데, 엘 그레코는 비구상의 큰 문을 연 화가로 중심 이미지만 부각시키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문학과 예술의 황금세기(Golden Age‧16~17세기)로 불리는 1547년에 태어났으며, 근대적인 성격소설을 창시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그의 생존 시기는 중세의 신본주의가 쇠퇴하고 새로운 인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전환기와 맞물려 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진행중이고, 가치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개성과 합리성은 착지(着地)가 불안한 채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며, 현세적 욕구만이 분출하여 정의는 퇴색되고 사회 부조리는 두께를 더해갔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그의 『소설의 이론』에서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를 절망 상태에 놓인 위대한 신비주의가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던 시대, 쇠퇴해가는 종교(가톨릭)를 재생시키려고 광적으로 시도하던 시대, 새로운 세계인식이 신비적인 형식 속에 등장하고 있던 시대, 실제로 체험은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목적을 상실한 채 시도적으로만 찾던 신비주의의 시대라고 정의했는데, 그것은 고삐가 풀려버린 마성(摩性)의 시대이자, 지속되어온 가치체계 내부에서 거대한 혼돈이 발생하고 있던 시대라고도 했다.

▲ 요령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치는 우리 현실에 창을 들이댈 것 같은 돈 키호테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의 인근 대학도시이며 출판업이 성행한 아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에서 외과의사의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드리고 데 세르반테스는 외과의사라지만 마을을 찾아다니는 떠돌이 의사여서 평생 구차하게 지냈으며, 세르반테스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의 지식과 교양은 많은 독서를 통해 쌓여졌다고 하는데, 그가 제도권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다는 추정과 그의 빛나는 어록과의 상반된 차이점을 놓고 볼 때 독학의 비중은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세르반테스는 21세 때에 마드리드에서 학교를 경영하던 인문학자이면서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물려받은 오요스에게 배웠다는 자료가 있고, 그때 오요스를 통해 종교비판서 『우신예찬(愚神禮讚)』의 저자 에라스무스를 비롯하여 여러 사상가들의 정신세계와 접한 걸로 추정된다. 영국의 정치가이며 인문주의자인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감명을 받은 세르반테스는 종교의 자유, 사랑의 자유, 정의로운 재판, 세습제도 폐지를 평생 꿈꿔왔다.

세르반테스가 처음 발표한 문학작품은 시였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아름다운 서정성 말고도 아이러니, 유머, 풍자 등 그의 특색이 가미된 시풍을 확립해간다. 이듬해에는 왕의 특사로 마드리드에 주재한 아쿠아비바 추기경의 시종이 되어 이탈리아에 건너가게 되는데, 밀라노 플로렌스, 베네치아, 로마 등지에서 체류하며 이탈리아어와 고전 라틴어를 익히고 고대 로마의 대표적 시인들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의 원전을 탐독하면서 르네상스 문학에도 심취한다.

23세 때인 1570년 나폴리에 주둔중인 스페인 보병대에 입대한 그는(당시 스페인은 이태리 남부를 지배) 이듬해 그의 생애를 뒤바꾼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교황청, 스페인, 베네치아가 신성(神聖)조약을 체결하여 기독교 공동의 적인 오스만 투르크와 대결한 이 전쟁에서 세르반테스는 가슴에 두 발, 왼팔에 한 발의 총상(혹은 언월도로 찔렸다는 설도 있음)을 입어 왼팔 없이 일생을 보내게 되며 ‘레판토의 외팔이’란 별명을 얻는다. 하지만 그는 “오른팔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하여 왼팔을 잃었다.”고 그 명예로운 부상을 평생 자랑으로 여겼으며, 그때의 군생활이 일생에 가장 보람된 세월이라고 훗날 술회한다.

서른다섯 살 때인 1582년 세르반테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군대에 들어가지만 군 출신 실업자가 늘어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와 인근 톨레도에서 창작에 전념한다. 첫 번째 소설인 『라 갈라테아』를 비롯하여 첫 극작품 『알제리에서의 대우』 등을 집필한 그는 희극배우의 아내였던 로하스와 교제 중 유일한 혈육인 딸 사아베드라를 얻지만 곧 헤어지고, 톨레도 근처의 소지주 딸인 19세 팔라시오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돈 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37세 때 그라나다의 세금 징수원이 되어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을 때 그곳 세비아 감옥에서 구상된다. 징수한 돈의 예금을 맡았던 세비야의 은행가가 파산 후 도주하는 바람에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전편을 1605년에 완성하고 후편은 나중에 가짜 후편이 나도는 바람에 68세의 노령을 무릅쓰고 서둘러 완성하는데 거기에는 문학 말고도 인생론과 역사철학론에 관한 논의까지 포함되어 있어 기발한 공상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1616년 4월 2일 병으로 쓰러진 세르반테스는 4월 23일 조용히 운명한다. 그의 유해는 마드리드 우미아델로 수도원에 묻혔다가 칸타나라 수도원으로 옮겨졌으나 이장 중에 무덤이 뒤섞여 아쉽게도 그의 무덤은 사라지고 만다. 셰익스피어, 몬테뉴 등과 동시대 사람인 그는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훗날 심심찮은 화제를 남기게 된다.

세계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세르반테스. 그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 작가론적 측면이 부실하고 작품으로만 남게 된 이유도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려 생명과 생계의 위협을 받을 만큼 생활이 불안정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반의적 체험이 선량한 그의 정신세계를 독창적으로 개량시키고 착상(着想)에 작용하여 『돈 키호테』와 같은 불멸의 작품을 쓰게 한 것은 운명의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고난을 겪지 않고 순탄한 생을 영위했다면 과연 공상으로 미친 한 인간의 거룩한 불장난에 659명의 등장인물을 동참시키는, 그런 환상적인 플롯이 가능했을지.

세르반테스의 종교관념이 균열되었다고 보는 것도 사회 부조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황금세기 문학 연구에 전념한 아메리고 카스트로는 『세르반테스의 사상』에서 세르반테스는 가톨릭 교리에 우호적이면서도 인문주의적 입장에서는 종교의 권위주의적(정치적) 모순성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썼다.

꼭 다시 가보고 싶던 스페인 광장은 마요르 광장 인근에 있었다. 마드리드의 중심 번화가인 그랑비아와 연결된 광장 중앙에는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이 높이 서 있고, 그 아래에 세르반테스의 동상을 비롯하여 로시난테를 탄 돈 키호테와 당나귀를 탄 산초 판사의 동상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오랫동안 제자리에 서서 돈 키호테와 산초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한갓 금속에 불과한 동상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들의 동상은 살 속에 피가 흐르는 생명체로 살아난다. 나는 먼저 돈 키호테와 몇 마디를 나누고 나서 산초에게 물었다.

“산초 판사 씨, 당신은 주인님에게 말타고 지나가는 여자를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 공주라고 속였는데, 양심에 찔리지 않았소?”

“찔리기야 찔렸죠. 하지만 나는 주인님이 기뻐하실 걸 생각하면 그런 비양심이 진짜 양심보다 훨씬 값지다고 생각했다오.”

나는 산초의 동상을 새로운 마음으로 우러러 본다. 사실 산초 판사는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속물적인 인간형에서 돈 키호테적인 숭고한 인간형으로 미끄러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작품 속에 나오는 수많은 격언도 대부분이 산초의 입을 통해 나온 민중의 지혜였다.

소설 『돈 키호테』에서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한 신비성을 놓고 볼 때 둘시네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돈 키호테가 아가페적 사랑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상징적 존재라면 둘시네아는 진리(신)의 세계로 영혼을 인도하는 거룩한 사랑의 표상이 된다. 페르난도 리엘로는 돈 키호테의 정형성을 논하기 위해 파우스트를 인용하면서 돈 키호테의 사랑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파우스트의 사랑을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대립시키기도 했다.

총포의 보급으로 중세의 기사도 정신이 몰락하는 시기에 나온 소설 『돈키호테』는 중세의 유럽을 풍미해온 기사소설의 종연을 가져온 완벽한 작품이다. 출간 당시 무척 ‘재미있는’ 소설로만 여겨져 제대로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한 『돈 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전기(傳記)가 나오고 문학적 연구가 시작되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찬란한 광명천지에 드높이 꽂힌 깃대처럼 우뚝 선다. 낭만주의를 신봉하는 문인들은 이 스페인의 근대소설을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끝없는 대립의 상징으로 해석했으며, 주인공인 돈 키호테를 자유를 실천하는 영웅의 원형으로 받들었다.

자유와 정의와 박애의 실천적 의지에 불타 자기 몸이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돌진하는 돈 키호테는 어쩜 오늘날에 꼭 필요한 개혁형 인물인지도 모른다. 요령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치는 우리 현실에(특히 우리 문단 현실에) 가차없이 창을 들이댈 용사. 그런 돈 키호테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