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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좇는 투사형의 고매한 이상주의자 돈 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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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좇는 투사형의 고매한 이상주의자 돈 키호테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4)-세르반테스와 키호티즘(상)

황량한 라 만차 평원에 도착하자 호흡 일순간 정지


남은 후손은 풍차와 『돈 키호테』 상품화해 관광수입 올리는데…


상상의 여인 둘시네아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 울적


보잘것없는 여인을 고귀한 공주로 받드는 돈 키호테적 사랑


▲ 돈 키호테와 산초판사의 동상

[글로벌이코노믹=김용만 소설가] 흔히 인간의 성격 유형을 『햄릿』형과 『돈 키호테』형으로 나눈다. 전자가 행동없이 생각만 하는 유형이라면, 후자는 생각 없이 행동만 하는 유형이다. 세르반테스는 소설 『돈 키호테』에서 편력기사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從者) 산초 판사의 독특한 성격을 창조함으로써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함께 성격묘사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돈 키호테의 고매한 이상주의는 산초 판사의 저속한 물질주의와 대조를 이루면서도 서로 상보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데 돈 키호테는 꿈을 좇는 강한 투사형의 전형으로, 산초는 착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로 대변된다.

스페인의 유서 깊은 도시 그라나다에서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곧장 버스에 올랐다. 23년 만에 다시 세르반테스의 발자취와 소설 『돈 키호테』의 무대를 답사하게 된 셈이다. 1987년에는 수도 마드리드와 톨레도를 거쳐 라 만차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이웃 나라인 포르투갈과 모로코를 거쳐 라 만차로 들어가는 코스였다.

리스본 관광이 끝나자 우선 모로코부터 다녀올 생각이어서 국경 쪽으로 향했다. 스페인으로 넘어가 세비야에서 하룻밤을 자고 지브롤터 해협으로 빠질 참이었다. 산협을 넘자 끝없이 너른 안달루시아 평원이 펼쳐진다. 차분하게 속도를 유지한 버스는 어둠이 깔릴 무렵에야 안달루시아의 주도(州都)이자 플라멩코의 본고장인 세비야에 도착했다. 전설적인 인물 돈 후안의 여성 편력을 비롯하여 비제의 <카르멘>과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무대로 유명한 세비야.

▲ 갑옷과 마상의 기사
나는 비를 맞으며 돈 후안이 자주 들렀다는 카페에서 커피도 마셔보고 스페인광장에 있는 미술관도 관람하다가 지브롤터 해협의 관문인 사리파 항으로 향했다.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해협을 건넌다는 기대와 맹인 가수 로드리고의 애수 어린 노래가 어우러진 코치투어였다. 파도가 높아진 탓에 밤이 늦어서야 페리호를 탈 수 있었지만 모로코의 관문인 탕제르 항의 야경에 취해 나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호텔방에 들었다.

이튿날에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버스를 탔다. 아침에 탕제르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모로코의 고대 도시 페스에 도착했다. 인구 65만의 페스는 이드리스 왕조의 도읍지이며, 항구도시 카사블랑카와 수도 라바트에 다음가는 큰 도시로 구시가지는 12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페스에서 저녁을 먹고 전통공예품과 가죽제품 등으로 유명한 재래시장 메디나를 구경한 다음, 영화를 통해 추억의 도시로 각인된 카사브랑카까지 4시간여를 더 달렸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모로코의 수도 리바트를 거쳐, 다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피카소의 생가가 있는 스페인의 휴양도시 말라가에서 짐을 풀었다.

이튿날은 고대 도시 코르도바로 향했다. 말라가에서 코르도바로 가는 평원은 온통 올리브나무 농장으로 뒤덮여 있다. 메세타(산언덕 분지) 지형에 드러난 하얀 집들은 안달루시아 평원의 전형적인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안달루시아는 세르반테스가 세리로 있을 때 세금을 받으러 다닌 곳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라나다를 출발한 버스는 어느새 라 만차 평원에 접어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황량한 분지와 들판이 열리자 금방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드디어 『돈 키호테』의 배경인 라 만차 평원을 달려본다는 낭만이 일순간 호흡을 막았던 것이다. 라 만차는 내 뇌리에 낭만 어린 땅으로 입력되어 있다. 맑은 햇살, 끝없는 평원, 엔씨나레스 숲, 평원을 뒤덮은 올리브나무는 항상 내 눈에 선하다.

『돈 키호테』의 배경 중에서 나는 돈 키호테가 여관 주인에게 세례를 준 캄포 데 토보소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공격했던 캄포 데 크리프타나를 차례로 답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토소보는 여관의 흔적도 없고 아무 표시도 없어 곧장 캄포 데 크리프타나로 향했다. 안내서에 약 2000명쯤 되는 주민들이 풍차와 『돈 키호테』를 상품화해서 관광수입을 올린다고 적혀 있듯이, 시골 면 소재지 크기의 크리프타나는 규모는 작지만 무척 활기차 보였다.

도심을 지나온 버스가 한가한 언덕길에 멈추자 나는 차에서 내려 풍차가 흩어져 있는 분지 복판으로 바삐 걸어갔다. 눈물이 나올 만큼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때였다. 로시난테의 안장에 올라타고 창을 든 돈키호테의 앙상한 환영이 다가왔다.

▲ 돈 키호테의 무대가 된 풍차
그 어이없는 자태를 보는 순간 나는 금방 이상주의자로 환원된다. 찌들고 탈색된 내 육체 속에 도사리고 있던 이상주의가 돈 키호테를 만나는 순간 다시 활개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돈 키호테가 로시난데의 등에서 내려와 나를 부둥켜안는다.

“잘 오셨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자그마치 400년 동안 기다린 거요. 그 사이 산초도 늙고 애마도 늙고 둘시네아 공주님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오.”

목 메인 소리로 인사를 마친 돈키호테는 멍하니 유채꽃이 만발한 평원을 바라본다. 아마 둘시네아 공주가 그리운 모양이다. 상상의 여인을 그리워하는 돈 키호테의 그 진실한 모습에 나 역시 기분이 울적해진다.

“돈 키호테씨, 당신은 현실과 싸우느라 세월을 잊어왔지만 나는 비현실과 싸우느라 몸이 이렇게 삭았다오.”

“나도 삭을 대로 삭았소. 나는 400년 동안 상상의 세계를 꿈꿔왔지만 이젠 정말 지쳤소.”

“아뇨. 당신이 신봉한 정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인류의 가슴을 울리고 있소. 당신의 이상주의는 이제 영원한 보편성을 획득했소. 키호티즘(Quixotism)은 현세주의로 퇴락한 인간의 고매한 정신을 되살리는 복원력으로 작용할 거요. 당신은 영원한 승리자요.”

“당신은 종교를 만들었잖소.”

“천만에요. 그건 종교가 아니라 어리석은 도그마일 뿐이었소. 나는 평생 그 어리석은 독단에 빠져왔소. 세상을 잘 못 산 거요. 허무와 싸우는 게 아닌데…. 허무와 싸웠으니 남은 게 뭐겠소. 고통밖에.”

이번에는 내가 돈키호테의 메마른 몸을 끌어안는다. 그때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려오자 돈키호테의 환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는 언덕에 홀로 서서 땀을 훔치는 초라한 여행자로 남아 있다. 일상으로 돌아온 그 환멸에 맥이 풀린다.

밤에는 황혼부터 동틀 무렵까지, 낮에는 동틀 무렵부터 어두울 때까지 기사소설을 탐독해온 몰락한 시골 귀족 알론소 키하노는 풍차를 거인으로, 양떼를 병사로, 여관을 성으로 여길 만큼 무용담에 빠져 종국에는 자신이 읽은 허황된 세계를 모두 사실로 믿게 된다. 모험을 좇는 편력기사가 되어 자신의 명망을 온천하에 떨치고 싶은 그는 ‘어떤 미치광이도 가져보지 못한 기이한 공상’에 빠져 자기가 아니면 이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쳐부수고자 하는 부조리, 바로잡아야 할 폐해, 처리해야 할 부채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있으면 그만큼 세상의 손실이 크다.”

알론소 키하노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옛날에 증조부가 쓰던 낡은 무기들을 꺼내어 녹을 닦고 손질하는 일이었다. 창검과 방패를 정리하여 갑옷을 갖춘 그는 자기 몸뚱이처럼 비쩍 마른 말을 타고 편력기사의 위용을 갖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그 위용에 어울리도록 돈 키호테라 정하고 나니 다른 편력기사가 그러했듯 종자가 필요했다. 그는 이웃에 사는 착하고 머리가 좀 아둔한 농부 산초 판사를 만나 구슬리기 시작한다. 온갖 달콤한 말에다, 자기가 모험하여 섬을 얻게 되면 그 섬의 총독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으로 산초의 마음을 산다.

드디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출정 길에 오른다. 돈 키호테는 창을 든 채 애마(愛馬) 로시난테를 타고 산초는 짐보따리를 챙겨 자기네 나귀를 타고 모험의 장도에 오른다. 돈 키호테는 산초를 데리고 편력 중에 첫 번째 공적을 이루자 이번에는 그 공적을 바칠 사모하는 여인이 필요했다. 편력기사가 사랑에 빠지는 건 너무 당연했다. 사랑 없는 편력기사는 “잎새와 열매가 없는 나무요, 영혼이 없는 육체”와도 같았다. 돈 키호테는 또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떤 거인과 겨뤄 단숨에 그놈을 때려눕히든가 몸뚱이를 반으로 동강내든가 그놈을 이겨서 항복을 받아낸다면 그놈을 갖다 바칠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그래서 선택한 여인이 시골 처녀농부 알돈사 로렌소인데 ‘사람들 말로는’ 돈 키호테가 그녀를 사랑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돈 키호테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무튼 그 처녀농부를 마음속에 담기로 작정한 돈 키호테는 자신의 위상과 어울리고, 공주나 귀부인에게도 합당한 이름을 찾던 중 마침내 둘시네아 델 토보소란 이름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그 상상 속 여인을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존재로 신격화시키고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둘시네아는 돈 키호테의 이상세계에 모셔진 지고의 신이며, 그 신을 통해 돈 키호테는 자신의 정의와 꿈을 구현할 수 있는 힘을 얻고 투지력을 키운다. 그런데 돈 키호테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인 듯이 행동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환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세상에 둘시네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 아니다.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돈 키호테의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저자 세르반테스의 역량에 놀라는데, 그 아포리즘은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렇게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보잘것없는 여자를 절세의 고귀한 공주로 받드는 돈 키호테적 사랑. 사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다소 돈 키호테적이랄 수 있고, 여성들은 그런 착각에 홀리기 십상이다. 어찌 보면 종교도 그런 믿음에 불과할지 모른다.

/글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