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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 신비 세계 체험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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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 신비 세계 체험시켜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2)-카프카의 문학세계(상)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작품들은
신비의 세계를 체험시켜

[글로벌이코노믹=김용만 소설가] 비엔나에서 리무진 버스로 6시간을 달려야 하는 그 여로의 끝자락에는 내가 ‘찾아 헤맨’ 카프카가 머물고 있다. 나는 오랜 세월 카프카를 찾아 헤맸다. 서점, 극장, 패션가, 카페, 사진관, 빌딩 광고, 연극 포스터에도 존재하고 심지어 내 서재에도 존재하는 그 흔하디흔한 카프카를 나는 진정 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의식 속에는 그가 인간이면서 인간의 전형을 비켜난 존재로 입력되었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그에 대한 연구서가 수천 권을 넘을 만큼 친숙한 이름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세계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이름이지만 내게 있어 카프카는 안개에 가려진 작가였다.

카프카의 이미지가 그처럼 낯설게 인식된 까닭은, 그가 죽은 지 84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카프카의 작품이 기존 틀과 아주 어긋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작품들은 독자에게 신비의 세계를 체험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마력은 시공을 초월한다. 요컨대 난해성이 독자를 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잠을 깨워주는 셈이 된다. 불안, 고독, 소외, 부조리, 고뇌, 좌절 등 어두운 관념어들을 독특한 언어 조탁을 통해 소름끼치는 환상세계로 형질변경시킨 카프카의 조화(造化)에 독자들은 끊임없이 홀리고 있다는 말이다.

▲ 카프카의 소설 '유형지'에 나오는 처형기어둠이 깔려서야 프라하에 도착하여 볼타바 강가에 있는 호텔에 들었다. 이튿날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곧장 버스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흐릿챠니 언덕에 올랐다. 평평한 정상에 성이 나타난다. AD 870년 보헤미아 독립국의 보리보주 왕자가 세운 중세풍의 육중한 프라하 성이다. 그 성은 궁궐, 교회, 미술관, 박물관, 광장 등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문화공간으로, 카프카가 자주 산책했고 그의 소설 「성」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프라하성에는 아침부터 각국의 관광객이 번다하다. 궁정 앞 광장을 에두른 르네상스 식, 바로크 식 등 고풍스런 건물들이 역사의 하중을 드러낸다. 언덕을 내려가며 비트성당에 들렀다가 근처에 있는 황금소로(黃金小路)에 갔다. 동화 속에 나올법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인데 길가의 집들은 모두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이 거리는 원래 성안에서 일하던 집시와 하인들이 거주하기 위하여 지어졌으나, 나중에는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황금소로(黃金小路)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벌서 5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16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현재는 선물 가게, 레코드 가게, 서점 등이 들어서 있다.

프라하 황금소로는 16세기 그대로
카프카기념관 입구에 카프카 입상

그는 중간적 위치에 머문
'경계적 존재'

그의 작품은
다양한 해석 가능하고 낯설어


드디어 카프카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도 역시 카프카답다. 마당 복판에는 파란색의 조형물로 된 두 남자의 벌거벗은 입상이 서 있고, 그들은 마주보고 서서 성기로 오줌(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 쪽 마당에는 카프카의 이니셜인 육중한 K자가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너른 공간에 현대적인 시설로 꾸며진 전시관 입구에는 카프카의 입상이 서 있고 그 옆에 설치된 판매대에서 노파가 책과 잉크, 볼펜, 사진, 엽서, 열쇠고리 등 문화상품을 팔고 있다. 전시실 내부를 차례로 관람했다. 카프카의 저서, 가족사진, 육필원고, 일상용품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허공에 걸려 있는 여인들의 유리판 속 얼굴이 인상적이다. 처음 약혼한 펠리체 바우어와 카프카의 숱한 연서를 받은 밀레네 등 카프카와 인연이 얽힌 여인들로 그 중에서도 도라 디아만트의 얼굴이 가장 육감적이다. 20대 초반인 디아만트는 카프카와 처음 동거한 여성이며 카프카가 이 세상과 마지막으로 작별한 키를링 요양소에까지 동행한 연인이다.

카프카에게 있어 문학은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당위였다. 소년시절부터 스피노자, 헤겔, 니체 같은 철학자에 빠졌던 카프카는 원죄와도 같은 상처를 지닌 채 이방인으로 태어난 셈이다. 프라하의 도심과 유대인의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와의 중간지점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정통적인 동방 유대인이 아닌 유럽화한 서방 유대인이었으며, 유대교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도도 아니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이 아니고,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인도 아니고, 관청에 다녔지만 진정한 관리도 아니었다. 그는 관료의식이 없었다. 프라하 노동자 재해보험국 법규과에 근무하면서도 밤에는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소설이라고 하는 반역행위에 몰두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카프카는 그의 작품 주인공들처럼 중간적 위치에 머문 ‘경계적 존재’였다. 이 경계지대에서 그는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인과율과 합목적성이 부정된 세계를 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자연발생적으로 열린 카프카의 세계에 대해, 오직 카프카 한 사람만이 소유하는 사상이어서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좋다, 나쁘다, 라고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썼다. 즉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며, 수수께끼 같고, 오직 카프카 개인적인 것이라는 말인데 그게 카프카의 단독성(單獨性)이다.

▲ 볼가강 다리에 선 소설가 김용만.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 헤르만 카프카와 뢰비 가문의 율리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육점을 경영한 아버지 혈통은 사업력과 지구력과 정복력이 강한 반면, 어머니 뢰비의 혈통은 고집이 세고 민감하며 정의감이 강했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의 성격에 가위눌려온 카프카는 끝내 아버지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는 훗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통해 “저는 카프카의 가통이지만 어머니 쪽인 뢰비가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아버지 헤르만은 아들을 관료로 키우고 싶어 했지만 어린 카프카의 내성적인 싹수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는데, 문학이나 예술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는 장남인 카프카의 신분 향상을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였던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독일어 학교에 보낸다. 카프카는 법률공부를 시키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프라하의 독일계 학교인 카를대학교에서 법률학을 전공은 하되 독문학과 예술사 강의를 듣기도 했으며,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서 1년간 법관 수업까지 마쳤으면서도 결국은 법조계를 떠나 보험회사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곳 보험 업무가 일이 많아 소설 쓸 시간이 없자 노동자 재해보험국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카프카의 문학은 그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실존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간의 존엄성은 여지없이 추락하고 일반 대중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으며 획일적인 규격품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었다.

자연히 어디에든 소속될 수밖에 없었다. 소속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카프카는 유고(遺稿) 『아포리즘』에서 이렇게 썼다.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과 동시에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요컨대 인간존재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법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법은 법률규범을 의미한다기보다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약속이나 체계를 의미하며 신이나 종교적 율법, 관료주의나 경제 이데올로기 등으로 확대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방대한 경제구조는 공동사회의 기능적인 역할을 잘 감당하는 인간만을 선호한다. 자기 자신의 개성과 본래성은 용인될 수 없다. 개별성은 악의 개념이다.『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본래성을 인식했다가 추악한 딱정벌레가 되고 말았으며,『투쟁의 기록』에서는 인간을 “은박지 종이로 만들어진 인형들”로 묘사했고, 미완성 작품『시골에서의 결혼 준비』에서 주인공 라반은 자신을 주체적인 ‘나’가 아닌 회일적이고 기능화된 세인(世人)이라고 불렀다. 세인으로서의 인간은 사랑이니 영혼세계니 하는 중심 가치가 거부된다. 개인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거니와, 카프카는 그것들을 딱정벌레처럼 추하고 그로테스크한 사물로 형상화한다.

카프카의 일생을 조감할 때 아버지와의 불화와 막스 브로트와의 우정 관계가 맨 먼저 떠오른다. 카프카가 영원한 친구 막스 브로트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인 1902년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 카프카는 대학시절에는 프라하 독일 대학생들의 독서클럽이 주관하는 연설 행사 및 시 낭송회에 즐겨 참가했는데 거기서 브로트를 만난 것이다. 브로트가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대하여 강연했던 것이다. 시, 소설, 희곡, 연극, 음악비평 등 예술의 전 장르에 걸쳐 명성을 날리던 브로트는 신문이나 잡지의 비평과 강연 등을 통해서 카프카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카프카가 죽을 임종시에는 그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카프카 사후 즉시 작품들을 출판하기 위해 유고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소수의 지식층에만 알려져 있던 카프카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란 프라하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악마적 톤으로 묘사한 대상은 훗날 그의 세 누이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파시즘이 아니라 합스브르크가의 통치 세계였다. 파시즘이 발흥하기 훨씬 이전, 유럽 중심가에 새벽안개처럼 퍼져 있는 그 기분 나쁜 막연한 불안감은 카프카를 통해 악마적인 실체(창작물)로 드러났던 것이다.

현실세계가 불안할수록 이상세계의 윤곽은 더 확연히 드러나는 법. 카프카는 독일계 학교를 다니고 독일어를 썼지만 프라하의 상류층 독일인들로부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오니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때문에 카프카는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혐오하고 억압이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는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성명서를 만들고 사회주의 서클에서도 활동한다.



필자 김용만 소설가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덕분에 전국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생계를 잇기 위한 힘겨운 사투는 그를 ‘체험 작가’로 만들었다. 『현대문학』에 늦깎이로 등단한 후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했다. 특히 첫 소설집 『늰 내 각시더』(실천문학사)를 출간하면서 정통 단편소설 미학과 독특한 향토적 문체로 문단의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인간의 시간』(문이당), 『칼날과 햇살』(중앙M&B),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과 내 허튼소리』(랜덤하우스) 등 잇따라 문제작을 발표했다. 지금은 경기도 양평 잔아문학박물관 관장으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소설쓰기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