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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고동 닮은 음색 구현…엑스포 명물에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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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고동 닮은 음색 구현…엑스포 명물에 자부심"

▲ 여수엑스포의 명물로 떠오른 파이프 오르간 '복스 마리스'. /홍정수 기자파이프 오르간 제작 가능한 나라는 10개국뿐

저음의 허스키한 한국적 소리 재현하는 게 꿈
오는 9월말 중소기업중앙회 건물에 작품 설치

여수엑스포 파이프 오르간 '복수 마리스' 설계자 홍성훈 오르게 바우 마이스터

지난 5월 12일 개막된 여수세계박람회에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명물이 있다. 바로 뱃고동 음색을 구현한 세계 최대 크기의 파이프 오르간 ‘복스 마리스(Vox maris)가 그 주인공이다. ‘바다의 소리’를 뜻하는 복스 마리스는 지난 30년 동안 하루 5만t씩 시멘트를 저장하던 원통 모양의 사일로를 재활용해 만든 악기로 국내 유일의 파이프 오르간 제작자인 홍성훈(53) 씨가 직접 설계했다.

IT기술과도 접목해 스마트기기를 통해 관람객들이 직접 연주에 참여해 볼 수 있는 복스 마리스는 피아노에 버금가는 80음계의 소리까지 낼 수 있다. 이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파이프오르간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러나 화려함 이면에 아쉬움도 있다. 설계자인 홍성훈 씨가 직접 제작에까지 참여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여수엑스포조직위원회가 파이프오르간이 서구에서 유래된 점을 들어 독일의 헤이 오르겔바우에게 제작을 맡겼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파이프오르간을 만드는 명인이자 ‘1인 기업’ 오르겔바우 대표이기도 한 그는 한국의 언어와 풍경을 닮은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하는 게 꿈이다. 한국적 소리와 문화를 지닌 파이프오르간을 만들고 있는 오르게 바우 마이스터 홍성훈 씨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복포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산업시대의 유물로 방치됐던 폐사일로가 아름다운 악기로 탄생했는데….
“여수 시민들이 산업화 시대의 상징물인 폐사일로를 친환경 랜드마크로 만들자고 제안한 후, 한경대 홍승표 교수가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제가 오르간을 설계했지요. 조직위원회는 친환경 박람회를 표방하는 여수엑스포에서 가장 여수엑스포다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선 스카이타워가 바로 그 대답이라고 말하더군요. 여수 앞바다의 뱃고동 음색을 파이프 오르간에 담음으로써 엑스포의 열기가 세계로 뻗어나갔으면 합니다.”


-파이프오르간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온갖 ‘피리’를 한데 모아놓은 군락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유럽의 오르간 문화는 급강하하고 있는 반면에 아시아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선두에 한국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오르간은 다른 악기와 달라서 그 지역 사람의 습성, 정서,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피리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서민적인 악기로서 이탈리아에 가면 이탈리아의 소리가, 프랑스에 가면 프랑스의 소리가 납니다. 만일 한국에서 이탈리아의 소리가 나면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온 오르간 문화를 우리 정서에 맞는 문화로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악기 64종 가운데 순수 우리 악기는 대금과 가야금 단 2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악기의 소리를 들어도 좋은 건 왕산악이나 우륵이 우리의 소리로 재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들어온 꽹과리의 경우 중국은 쵕~쵕~하는 소리가, 우리는 괭~괭~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리를 찾아 제가 만드는 파이프오르간에 담으려고 합니다.”

-언제부터 오르간을 직접 만들겠다고 생각하셨나요?

“1997년 9월 독일에서 오르겔 바우 마이스터 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한국에 들어왔을 때 저도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원래는 딜러를 하고 싶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게 되어 지금까지 외롭게 힘겨운 싸움을 해오고 있습니다. 어떤 프랑스인이 찾아와서 파리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프랑스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을 때 그 힘든 세월을 보상받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칭찬 한번 듣지 못했습니다.”

-오르겔 바우라는 말은 ‘오르간을 건축한다’는 말입니다. 왜 오르간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건축한다고 하는지요?

“오르간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영국,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폴란드, 캐나다 등 10개국뿐입니다. 산업이 뒷받침 되고 문화가 발전해야 오르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철, 가죽, 나무, 주물, 합금, 수학 등이 모두 발달해야 합니다. 결국 근대산업이 자리를 잡아야 하나의 종합예술로서 오르간이 작동된다고 할 수 있지요.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오르간은 민족적 색채가 대단히 강하고 국가의 자존심과 같은 민족의 우월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술적 안목도 높아야 하며, 음악 분위기도 총체적으로 성숙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르간은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악기가 아니라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건축에 다름아니지요.”

-정교한 기술과 함께 오르간 제작에 필요한 재료의 자급도 중요할 것 같은데….

“처음 한국에 와서 오르간을 제작할 때 대부분 수입재료에 의존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모터, 건반, 금속파이프를 뺀 나머지는 모두 국산 재료를 사용하고 있어요. 자급률을 따지면 70% 가까이 되는데, 핵심부품도 조만간 국산화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적 소리를 찾았다고 하셨는데 어떤 소리입니까?

“찾고 싶은 소리가 많은데 저음과 허스키한 소리를 먼저 찾았습니다. 대금이 그런 소리를 낸다고 할 수 있지요. 대금의 맑으면서도 허스키한 소리는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금속 대신에 제가 나무 파이프를 많이 쓰는 이유도 음을 타는 순간 생동감이 있고 바로 그것이 우리 정서에 부합하기 때문이지요. 종소리를 들을 때 낮게 깔리는 저음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종소리는 높은 소리 같지만 뭔가 같이 가는 그런 소리가 납니다. 티는 안 나지만 구름 같은 이 소리는 아주 명료하고 우리 심성에 잘 맞아 떨어지지요.”

-마이스터를 받기까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한국 국적을 가지고 마이스터가 된 것은 제가 최초이고, 한국계 독일인이 저보다 먼저 받았어요. 독일은 도제의 길을 걷던가, 아니면 학문의 길을 걷습니다. 각 직업 분야마다 다르지만 도제식 수업을 하는데 3년 반 동안 1년에 두 번 정도 모여서 수업을 해요. 수업이 끝나면 다시 각자의 회사로 돌아가 일을 합니다. 그 시절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어학이었고, 그 다음이 그들의 문화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밥 먹는 것도 다르고 대화의 내용도 우리와 사뭇 다르고….”

-그동안 몇 개의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하셨는지요?

“작품은 주로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용인 수지의 아름다운 동산교회, 파주 예수로교회, 논현동 성당, 천주교 광주대교구 임동주교좌성당, 분당 선사교회, 광화문 새사람선교회, 가평 채플의 세라믹 콘서트홀, 도서출판 십대들의 쪽지, 구로의 아트밸리 등에 10개를 제작했고, 지금은 오는 9월 30일 중소기업중앙회에 납품할 열한 번째 오르간을 제작 중에 있습니다. 특히 구로의 아트밸리 건물에는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을 해체해 벽에 시계의 바늘처럼 조형 작품을 만들었지요.”

-국내에는 오르간이 몇 개 있습니까?

“120여개쯤 됩니다. 1970년대 세종문화회관에 파이프오르간이 들어서면서 굉장히 새로운 문화를 경험했고 해외여행이 늘어나면서 유럽의 성당에 있는 파이프오르간의 오묘한 소리에 충격을 받았지요. 여기에 교회 부흥과 더불어 파이프오르간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은 고가(高價)인지라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오르간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학마다 오르겔과가 생겨나면서 연주자가 1년에 150명씩 배출되고 있습니다. 파이프오르간 연주자로 등록된 사람만 1200명입니다.”

-파이프오르간 제작 중 제일 힘든 일은 무엇인지요?

“저를 도울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가르치면 나가고 가르치면 나가고 인재가 없다는 게 제일 힘듭니다. 그렇다고 외국인 노동자를 쓸 수도 없고…. 물론 외국 기술자를 영입할 수도 있겠지만 파이프오르간은 전수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제일 중요합니다. 파이프오르간 제작에 워낙 오랜 시간이 걸리다보니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괴리감이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제작자로서 조력자를 찾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이 다른 악기 소리와 가장 다른 점은?

“오르간은 우선 히포크라테스가 치료를 하다가 고칠 수 없는 병은 플룻을 불라고 했는데 그만큼 오르간은 작은 피리, 큰 피리의 군락으로서 사람의 심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입니다. 피아노처럼 직설적이지 않고 트럼펫처럼 강렬하지만 비수처럼 꽂히지도 않고 가장 자연스런 소리라고 할 수 있지요. 오르간 소리는 우리 심성이 들뜨면 안 들리고 마음이 내려앉아야 들립니다. 오르간에는 좋은 소리만 있고 나쁜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드럼을 치거나 트럼펫과 색소폰을 불면 더 짜증이 나지만, 오르간은 내면의 소리를 들려주면서 우리를 치유해줍니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유럽의 오르간 문화가 쇠퇴하고 아시아의 오르간 문화가 부흥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 특유의 오르간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의 재료로 우리가 만든 오르간을 통해서 새로운 소리의 확장에 도전해보는 게 꿈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된 정악인 수제천(壽齊天)과 한국 전통음악 가운데 궁중이나 민간에서 연주되던 현악합주곡인 영산회상을 편곡해 파이프오르간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오르가니스트가 모차르트, 바하를 연주해 감동을 주는 것처럼 속된말로 죽이는 음악이 나올 것 같습니다. 유럽이 400년 동안 연주하며 실험해서 만들어 놓은 음악을 수제천이나 영산회상을 통해 승화한다면 앞으로 50년이 지난 뒤 오르간의 종주국 독일이 한국에 와서 배우지 않을까요?”


-중소기업중앙회에 들어갈 열한 번째 작품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소리 못지않게 파이프오르간 외형적으로도 한국의 색깔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한걸음 더 나갔습니다. 어떤 분은 오르간을 망치지 말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서양문화가 한국의 토종문화로 바뀐다면 기분 좋은 일 아닌가요? 열한 번째 파이프오르간은 먼저 파란 색깔이 파격적입니다. 파란색은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스타에서 성모가 입은 옷 색깔이기도 하고 신비하고 숭고하며 창작과 비전의 색이기도 합니다. 뭔가를 해야 하는 중소기업에 비전을 주고 창의적인 중소기업이 될 것을 제안하는 의미에서 파란색을 쓴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통 파이프가 전면에만 있는데 이번 악기는 사방이 다 트여 있어 일종의 설치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움직이는 파이프 오르간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한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칠보나비 열두 마리가 붙게 됩니다.”


한국적 파이프오르간을 만든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온 홍성훈 오르겔 바우 마이스터. 한국의 소리를 찾은 그의 다음 행보는 파이프오르간이 악기이면서도 하나의 아름다운 조형물이 되도록 하는 작업에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수천 년을 이어온 한국의 칠예(漆藝)와 만나고자 최근 옻칠 아티스트인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noja@g-enews.com/노정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