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국내 주요 대기업과 중견기업 등 130여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이같이 ‘대기업 역할론’을 강조하며 고용·투자 확대를 주문했다. 지난해 ‘재벌개혁’ 기조로 대기업 압박에 나섰던 문 대통령이 올해에는 기업과의 소통을 핵심 화두로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미중 무역 전쟁과 중국 경기 부진 등 글로벌 경제 환경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고용·투자 확대’ 주문에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화답하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대외 불확실성 증대에 따른 역풍을 오롯이 기업이 감당해야 하는 만큼 기존 투자 계획의 현상유지도 쉽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유연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환경에서 자칫 고용과 투자의 경직성이 기업 전체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로봇·AI, 차량 전동화, 스마트카, 미래에너지, 스타트업 육성 등 5대 신사업에 향후 5년간 약 23조원을 투자하고 4만5000명을 채용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현 정부 출범 초기 LG는 19조 원 투자와 1만명 고용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5조원을 들여 경기도 이천에 D램 생산을 위한 신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 2015년 발표한 46조원 반도체 투자 계획의 하나지만 정부가 요청한 투자·고용 확대에 응답한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SK는 신공장의 고용 유발효과를 약 35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기업인들과의 대화’를 기점으로 대기업의 추가 고용투자 계획 발표 가능성도 점쳐졌던 것도 사실이다. 역대 정권마다 권력 수장 주문에 ‘대규모 투자’로 화답해 왔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재계 1위 삼성이 투자 계획 발표의 선봉에 섰고 그 뒤를 이어 다른 대기업들이 잇따라 투자 계획을 선보였다.
하지만 올해는 주요 대기업들이 지난해 발표한 기존 계획에 따라 단계별로 투자에 나설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매년 세계 경기와 트렌드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대기업으로선 지난해 발표한 투자 계획을 순조롭게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라며 “현 시점에서 대기업들의 추가 투자 확대 계획을 내놓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문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대한민국 1등 대기업으로서 작년 숙제라고 말씀드린 ‘일자리 3년간 4만명’은 꼭 지키겠다”며 기존 투자 계획 유지에 무게를 실었다.
일각에서는 현 정부의 ‘대기업 정책’ 기조에 변화 없이는 대기업도 미온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17년 7월에도 대기업 관계자를 청와대로 초청해 호프미팅을 가졌지만 기업 환경은 더욱 열악해 졌고 오히려 대기업 규제만 더욱 강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업에 대한 정부 정책이 바뀌면서 대기업도 이제 화답 수준을 넓혀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산업계는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 현안과 대기업 규제로 기업 경영에 여전히 부담을 느낀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당국은 이에 대한 이렇다할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 정부가 기업과의 소통에 나선다고는 하지만 피부로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다”며 “기업별 고용과 투자는 각 기업이 놓인 상황에 따라 진행해야 하지만 기업 환경을 개선시키지 않고 주문만 한다면 이것은 또다른 대기업 압박”이라고 지적했다.
민철 기자 minc0716@g-enews.com